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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원과 차세대의 더 알아가기] 멕시코에 심은 뿌리-윤종섭 회장 인터뷰

최종 수정일: 3월 24일

세계한인무역협회(OKTA) 몬테레이 지회

2026년 2월 21일


[ 들어가며 ]

영문학도로 학원 강사 생활을 하던 청년이 1993년, 33살의 나이에 처음 멕시코 땅을 밟았다. 이후 장갑공장·양말공장·안전장구 유통을 거쳐 건설업에 뿌리내리기까지 30여 년. 지금은 OKTA 몬테레이 지회를 이끌며 차세대 글로벌 인재를 돌보는 윤종섭 회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1. 멕시코와의 첫 만남

Q. 처음 멕시코에 오시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저는 원래 건설이랑은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에요. 영문학과 출신으로 학원에서 분필 잡다가 직접 학원을 운영했죠. 처음 멕시코 땅을 밟은 건 1993년, 33살 때입니다. 고등학교·대학교 동창이 멕시코시티 데피토 쪽에서 앙고라 스웨터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제가 LA 여행을 갔다가 '비행기로 3시간이면 멕시코에 갈수있다'는 말에 호기심으로 갔었어요.

그때만 해도 88올림픽, 86아시안게임 이후 우리나라가 해외여행 자유화를 막 시작할 때라 분위기가 굉장히 자유로웠거든요. LA 멕시코 대사관에서 초록색 비자 책자를 받아서 들어갔는데, 빈부 차도 아직 잘 몰랐고, 멕시칸들이 동양인에게 거부감이 없고 한국 사람이면 일본 사람과 똑같이 친절하게 대해주더라고요. 그게 첫인상이었습니다.


Q. 처음부터 사업이 잘 풀리셨나요?

아니요. 첫 번째 쓴맛을 일찍 봤습니다. 동창 친구를 통해 한국에서 물건을 보내줬는데, 살리나스 대통령 시절 달러 환율이 페소당 3.14로 묶여 있었거든요. 그런데 대통령이 바뀌면서 그 돈을 전부 달러로 빼서 도망가 버리는 거예요. 환율이 결국 지금 시세(18)까지 올라 6배 가까이 증가된 셈인데, 물건은 다 팔았고 매출도 일어났는데, 달러로 환전을 못 하니까 방법이 없는 거죠. 결국 포기하고 한국에 들어갔습니다.

그래도 멕시코가 참 묘한 나라라서, 자꾸 다시 가고 싶더라고요. 그러다 1997년 IMF 때 아버지께 '3년만 나가보자, 나가서 성공하면 직진, 망하면 돌아오자는 심정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맨땅에서 시작한 사업 — 장갑공장

Q. 본격적인 멕시코 사업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다시 멕시코로 나왔을 때 들고 온 것이 목장갑이었어요. 기계 40대를 멕시코시티에 들여와서 공장을 차렸는데, 문제는 제가 장갑 제조에 대해 하나도 몰랐다는 겁니다. 그래서 대구 장갑공장에 한 달 취직해서 먹고 자면서 밤낮으로 기계를 뜯었다 붙였다 배웠어요. 기계 고장 나도 제가 고칠 수 있어야 하니까요.

그리고 멕시코에서는 빨간 코팅 장갑이 안 팔려요. 무조건 파란 청색 코팅이어야 합니다. 그걸 몰랐으면 큰일 날 뻔했죠.


Q. 판매는 어떻게 하셨나요?

처음엔 멕시코시티의 철물점을 180군데나 직접 발로 뛰어다녔어요. 스페인어도 짧으니까 한-서 , 서-한 사전 두 권 들고 다니면서 모르는 단어는 그 자리에서 찾아가며 얘기했죠. 그러나 한번 납품 후엔 회전율이 좋지않아 다음 납품까지 오래 기다려야했어요. 그러다 아파트 이웃 노인분이 조언해주셨어요. '이러지 말고 공장에 안전장비로 팔아라.' 그 말 한마디가 사업을 바꿨습니다.

멕시코시티 공장지대를 무조건 뚫고 다니면서 구매 담당자 만나고, 샘플 들고 다시 찾아가고, 그렇게 풀어나갔더니 기계 40대로 모자랄 만큼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Q. 품질에도 신경을 쓰셨다고요?

그게 핵심이었습니다. 한국 장갑은 솔직히 일회용이에요. 끝단을 X자로 감고 불로 지져 마무리를 하기에 당기면 다 풀려요. 근데 저는 전부 오버로크(overlock)로 마감했어요. 그리고 실에 폴리 한 가닥을 섞어서 세 번까지 빨아 쓸 수 있게 만들었죠. '장갑을 빨아 써도 된다'는 게 통했는지, 빅마트·코플렌즈·러브메이드·마베 에스투파 등 대형 납품처가 하나씩 열렸습니다. SK Tampico 현장에는 장갑 몇백켤레를 비행기 타고 직접 들고 가기도 했어요. 물건값보다 비행기값이 더 나왔죠 (웃음)


3. 안전장구 사업의 확장

Q. 장갑에서 안전장구 전체로 넓히신 거군요?

네. SK 현장 담당자가 '장갑 말고 현장 안전제품 전체를 해보라'고 했어요. 헬멧, 보안경, 귀마개, 하네스, 유니폼, 안전화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때부터 공급업체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단가를 밀어붙여서 최저가로 만들었어요. .

직접 발품을 팔아야죠. 트럭 한 대 사서 10개월 만에 8만 5천 킬로를 탔어요. 피곤할 때는 콜라에 아스피린 타서 마시고 버텼습니다. 땀삐꼬 현장에만 작업자가 1만 5천~2만 5천 명이 일했으니, 그 사람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안전을 제 물건으로 지켜주었지요.


4. 양말공장의 시련

Q. 양말공장은 어떻게 하셨나요?

광고·인쇄 사업을 준비하다가 자금을 대준 사람에게 뒤통수를 맞았어요. 그러다 양말공장을 인수하게 됐는데, 인수해보니 작업자가 360명이더라고요. 120명씩 3교대로 돌아가는 공장이었습니다.

돈을 X몇만 불을 들였는데 공장 전체 기계 감정가가 X만 불밖에 안 됐어요. 억울하지만 없는 거 짜봐야 짜증밖에 안 나오니, '그거라도 준다니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서 운영을 시작했죠. 월마트 납품도 연결하고 어느 정도 돌아가나 싶었는데, 불법 서류 문제가 생기고 직원 농성, 이민국 단속까지 겹치면서 결국 정리했습니다. 1년 반 동안 마누라한테 생활비 한 푼 못 준 시절이에요.


5. 건설업으로의 전환

Q. 건설은 어떻게 시작하셨나요?

2002년 SK Tampico 공사가 마무리되면서 현장 소장님이 권유하셨어요. 저는 '시멘트 한 포도 들어본 적 없는 건축엔 문외한이다 라고 하였지만,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며 설득하시더라구요.  그래서 해봤는데 재밌는 거예요.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잘못한 것 잘한 것이 바로 드러나니까요.

도로 포장, 전봇대, 펜스, 용접까지 직접 부딪혀가며 배웠습니다. 인터넷이 느려서 팩스로 한국 건축사·기술사 친구들한테 물어보고, 건축 실무책을 보내받아가며 독학했죠. 그 뒤 포스코 현장에서 기계 기초를 맡아 프레스 수평을 5mm 이내로 맞추는 정밀 공사를 해내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LG·기아 협력사 공장들이 줄줄이 연결됐고, 2007년에 정식으로 건설 법인을 세웠습니다.


Q. 20년 넘게 공장 한 채도 안 무너졌다고 하시던데요?

그게 제 자부심입니다. 어떤 선배 소장들은 '철근 조금 빼도 안 무너진다'고 했는데, 저는 절대 그러지 않았어요. 나중에 비 오고 바람 불어서 무너졌을 때, 확인해서 시방서대로 된 게 나와야 내가 할 말이 있잖아요. 그게 자신의 일에 대한 프라이드입니다. 지금까지 진 공장이 무너진 적도 없고, 컴플레인 받은 적도 없어요.


6. 사업 철학과 인생론

Q. 직원들에게 항상 강조하시는 말이 있다고요?

'갑 같은 을로 일해라.' 발주처가 갑질을 해도 나는 을이 맞아요. 하지만 내 분야만큼은 내가 갑이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한테 휩쓸리지 말고, 내 전문 분야에서 만큼은 당당하게! 대신 그러려면 진짜 잘해야죠. 못하는 건 못한다고 솔직하게 얘기하고, 내 능력 밖의 일은 함부로 시작해선 안됩니다. 내 판단 하나 잘못되면 내 밑에 직원들 전부 피해를 보니까요.

흔히 운이 7이면 능력이 3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운은 가만히 있으면 오지않아요.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사람도 만나고 현장을 확인해야 그때서야 따라오는 것입니다. 말만 듣지 말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며 일을 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Q. 신용을 특히 강조하시는 것 같아요.

장갑공장·양말공장 할 때도 급여를 한 번도 밀어본 적이 없어요. 생활비를 마누라한테 못 줘도 직원 급여는 무조건 지급하였습니다. 그런 것들이 쌓이면 신용이 됩니다. 수천만 원짜리 TV 광고보다, 나와 일해본 사람이 '저 사람 믿을 만하다' 한마디 해주는 게 더 큰 영업이에요. 실제로 대우 공사 수주의 경우,  비행기에서 우연히 만난 분이 '윤종섭이라는 사람 아느냐'고 물어봤는데, 그 분이 '내가 믿는 동생이고 건축 잘한다'고 해줘서 연결됐습니다.


Q.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20대는 하고 싶은 거 해라. 나중에 '그때 했어야 했는데' 하면 너무 늦어요. 30대가 되면 가닥을 잡아야 합니다. 방향이 100% 맞다는 보장은 없지만, 내가 가던 길로 가게 돼 있거든요. 40대에도 못 잡았다면 그때는 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해요. 노가다든 운전이든, 시드머니를 만들어야 합니다. 50 넘어서는 그냥 닥치는 대로 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돈이라는 게 지금 내 앞에 쫙 깔려있대요. 사방이 다 돈이에요. 지나가면서 내 것을 주우면 되는데, 남의 것을 주우면 사기가 되고, 내 것을 못 줍고 지나가면 바보가 된다는 거죠. 어떤 게 내 것인지 판단하는 눈을 기르는 게 평생의 공부입니다.

 


7. 앞으로의 꿈

Q. 회사의 앞날을 어떻게 그리고 계세요?

우리 회사 RFC(사업자등록번호)는 2007년 설립 이래 한번도 바뀐 적이 없어요. (보통 절세 또는 탈세를 위해 3년에 한번씩 법인을 변경하는 것이 멕시코 입니다.) 멕시코에서 한국인이 세운 건설회사 중 가장 오래된 곳입니다. 내년이면 20년이 되는데, 20년 되고, 40년 되고, 60년 되어가는 회사로 남겼으면 합니다. 제 이름 석 자는 남지 않아도 되지만, '꼬리아노(한국인)가 하는 회사인데 정직하고 근실하다, 거짓말 안 한다'는 평판은 남기고 싶어요.

우리 회사는 부채 비율이 낮아요. 은행 대출도, 아는 분께 돈을 빌린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버텨온 거예요. 지금은 관공사와 주택사업도 조금씩 넓혀가려고 합니다.


Q. OKTA를 통해서는 어떤 역할을 하고 싶으세요?

기존에 계신 분들은 돈 많이 벌었고 잘 사세요. 저는 차세대 젊은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LA 지회에서는 창업 스쿨도 하고 사업 컨테스트도 열어서 1·2등 뽑아 지원해준다고 하던데, 우리도 그런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멀었지만, 결국 목표는 그쪽이에요.

제가 지금 누군가에게 베풀 수 있는 자리에 있다는 게 너무 감사해요. 돈이 남으면 나눠 쓰면 되잖아요. 교회도 필요하고, 후배들 양성하는 데도 필요하고. '내가 돈 벌어서 하겠다'고 기다리면 죽을 때까지 못 해요. 조금씩이라도 지금부터 시작하는 게 맞습니다.


[ 마치며 ]

영문학도에서 장갑 장수로, 안전장구 유통상으로, 그리고 건설회사 대표로. 윤종섭 회장의 멕시코 30여 년은 '내 것을 주우러 발로 뛴 시간'의 연속이었다. 고가의 광고보다 한마디 신용이 문을 열었고, 화려함 대신 정직함이 회사를 지탱해왔다. 그 뿌리 위에서 이제 차세대 교민들이 자랄 자리를 만들고 있다.

본 인터뷰는 2026년 2월 21일 녹취 내용을 바탕으로 재구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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